백제역사유적지구

Introduction

공주 공산성

공산성은 해발 110m인 공산(公山)의 정상에서 서쪽의 봉우리까지 에워싼 성이며 성벽의 둘레는 2,260m이다.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이며 사방에 성벽이 아직 남아있다.
성 안에는 왕궁지가 남아있어 공산성이 방어성으로서 중요했을 것이다.
공산성은 1980년대부터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성의 축조기법과 성 안의 다양한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백제 웅진시기(475~538년)에 축조된 공산성은 백제 이후에도 중요한 거점으로 역사 속에 등장한다.
백제 웅진시기에는 왕성이자 방어성의 역할을 하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불렸으며 사비로 천도한 이후에도 중요 거점으로 활용되어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이 피신하기도 하였다. 백제 멸망 이후에는 당나라의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어 군사령부의 거점이 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공주를 중심으로 웅천주(熊川州)를 설치하였다.
신라 말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공산성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충청감영을 공주에 두어 성 내부에 감영이 설치되기도 했으며 조선 중기에는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공산성은 백제 웅진시기의 왕성으로서, 성벽 축조에 사용된 판축기법(고운흙과 모래흙을 번갈아 다져서 쌓는 방법)과 벽주건물지 (도랑을 파 기둥을 촘촘하게 세운 후 고운흙으로 벽을 발라 만든 건물지)는 고대 중국 및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통한 백제 토목건축 기술의 발전과 전파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Introduction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에 있는 백제 웅진시기 왕실의 능묘군이다. 금강의 남안에 솟아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작은 구릉의 동남향 능선 8부 정도에 고분군이 위치하는데 표고 75m 내외 지점이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27년, 1932년에 이루어졌으며, 1971년 고분군의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무령왕릉이 발견되어, 조사가 이루어졌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발견된 백제 무덤으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과 벽돌무덤(전축분)이 있는데, 1~5호분은 돔형태의 굴식돌방무덤이며, 백제 전통의 고분 형태이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아치형의 벽돌무덤으로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형태이다. 이들 무덤들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하는 475년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벽돌무덤 2기를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이 모두 굴식돌방무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웅진시기 백제 왕실에서는 이미 굴식돌방무덤에 대하여 형식이나 구조면에서 제도적으로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왕실 전용의 무덤 양식으로 완전히 정착시킨 듯하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발견된 굴식돌방무덤의 구조를 살펴보면, 무덤의 입구인 널길[羨道], 시신을 모시는 나무널[木棺], 피장자의 껴묻거리[副葬品]가 함께 안치되는 널방[玄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부에는 무덤을 덮었던 거대한 봉분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봉분은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또한 무령왕릉과 왕릉원에는 2기의 벽돌무덤이 있는데, 6호분과 무령왕릉이 그것이다. 두 벽돌무덤은 아치형 천정, 장방형 묘실, 동ㆍ서벽과 북벽에 설치된 복숭아형 등감이 있으며 바닥에는 ‘인(人)’자 모양으로 벽돌을 깔고 벽과 연접하는 부분의 공간은 삼각형 벽돌로 채운 점 등이 특징이다. 6호분의 벽화는 벽돌무덤 내에 사신도를 그린 유일한 사례이다. 무령왕릉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되었다. 묘지석이 발견됨으로써 피장자가 무령왕 부부란 점이 밝혀졌으며 이들의 사망과 매장시점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로써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고분연구에서 유적과 유물의 연대결정, 고분 피장자의 신분추정에 결정적인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무령왕릉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석수와 도자기를 비롯하여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목관, 태국 및 인도와의 교류를 의미하는 장신구 등이 발견되어 백제의 수준 높은 국제적 문화교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Introduction

부여 정림사지

정림사지는 부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동쪽으로 금성산, 북쪽으로 부소산에 둘러싸여 있다.
백제 사비시기 수도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찰은 단연 정림사였다. 정림사지에 우뚝 서있는 석탑 표면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 왕조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적인 공간으로 정림사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의 고고학적 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중문, 금당지, 강당지 및 그 북·동·서편의 승방지, 회랑지 등이 확인되었다. 회랑에 접속된 북·동·서 승방지의 배치는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독특한 모습으로 백제에서만 나타난다.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예불대상이 되는 불상이 안치되는 금당과 부처의 사리가 봉안되는 탑이다.
정림사지는 강당과 승방지, 그리고 회랑으로 둘러진 공간 내에 탑과 금당을 일직선상에 배열하는 <1탑-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시대의 사찰터로서, 각 건물들은 기와로 쌓은 기단 위에 건축된 목조의 기와 건물이었음이 밝혀졌다.
정림사지에는 높이 8.3m의 5층 석탑이 있는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목조 건축양식으로 쌓은 석탑이며 백제 석탑건축의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준다. 석탑을 목탑의 양식으로 만들려면 재료의 무게가 무거울 뿐만 아니라 재료의 가공도 어렵기 때문에 특별한 기술 없이는 쉽게 만들 수 없다.
정림사지에서는 발굴결과 수많은 기와와 흙으로 만든 인형의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그 중 흙으로 만든 인형은 당시 중국 북위의 수도에 있었던 영녕사(永寧寺) 출토품과 제조기법과 형태가 상당히 유사하다. 또한 고려시대의 자료이긴 하지만 ‘정림사(定林寺)’ 글자가 찍힌 기와도 확인되었다.

Introduction

부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백제가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 후, 왕궁을 짓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던 곳이다.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했을 때와는 달리 웅진에서 사비로의 천도는 백제 성왕의 계획 아래 진행되었다.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에 대해서는 1980년부터 본격적인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었다. 30년이 넘는 장기간의 계획적인 고고학적 조사 결과 백제의 왕성구조에 대하여 많은 검토가 이루어졌다.

관북리유적은 백제의 새로운 수도, 사비에 조성되었던 유적이며 확인된 유구의 규모와 특징으로 보아 왕궁터로 추정되고 있다. 관북리유적에서는 대형건물지, 대형목곽수조, 저장시설, 연못 등이 조사되었다. 대형건물지는 중층의 누각건물로 부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북리유적에서 가장 큰 건물터이다.
익산 왕궁리유적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건물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익산에도 왕궁의 역할을 하는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관북리유적에서는 또한 4m 크기의 대형 목곽수조 두 곳이 발견되었으며, 수조와 함께 수도관 등의 배수시설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나무로 만든 목곽고와 돌로 만든 석곽고 등의 저장시설이 발견되었으며, 그 안에서 야채와 과일 씨앗 등이 확인되어 백제인들의 식생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부소산성은 관북리 유적의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으로, 평소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하다가 위급할 때에는 왕궁의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다. 서쪽으로는 백마강을 끼고 부여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표고 106m의 부소산 정상에 축조되었다. 산성 내부에서는 많은 수의 건물지가 발견되었고, 슬픈 전설을 간직한 낙화암도 이 안에 있다.
1993~1994년에 걸쳐 실시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계곡을 품으면서 외곽을 두르는 백제시대 성벽, 그리고 그 안에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 ~ 조선시대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부소산성 성벽의 축조방식은 이른바 판축기법인데, 판축기법은 부여 나성의 축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산성 내부에는 백제~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건물지, 석축, 저수조, 목책열 등 다양한 유구가 노출되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장기간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시설들은 부소산성이 처음 만들어진 이후 1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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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릉원

부여 왕릉원은 부여 능산리 나성 바로 밖에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백제 사비시기 왕실의 능묘군이다. 부여 왕릉원에 대한 조사는 1915년과 1917년에 이루어졌으며, 조사결과 세 가지 형식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존재하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즉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은 천장을 어떤 형태로 마무리했는지에 따라 아치형과 평천장 구조로 나뉘고, 평천장 구조는 다시 단면의 형태에 따라 육각형과 사각형 구조로 나뉘는데, 부여 왕릉원에는 세 가지 형식의 고분이 모두 존재하고 있다.

1호분(동하총)은 평천장 구조에 사각형의 돌방무덤이다. 무덤방의 4개의 벽면과 천장에 커다란 판석을 하나씩만 사용하였으며 벽면에 두껍게 회를 발랐다. 회를 바른 벽면에는 사신도를 그려 넣었는데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 북쪽에 현무, 남쪽에 주작을 표현하였다. 천장에는 연꽃무늬와 구름을 표현한 그림이 있다. 1호분 벽에 그려진 사신도와 연꽃을 통해 당시 백제인들이 도교와 불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신도는 도교의 방위신이고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2호분(중하총)은 아치형 구조의 돌방무덤이다. 1, 3~7호분이 커다란 판석을 사용하여 각 벽면과 천장을 구성한 평천장 구조와는 다르게 2호분은 잘 다듬어진 장대석을 사용하여 천장을 터널형으로 쌓았다. 3~7호분은 평천장 구조에 육각형의 돌방무덤이다. 구조와 축조 방식은 1호분과 유사하지만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하게 만든 후 판석을 덮은 구조로 단면이 육각형으로 처리된 것이 특징이다.
백제는 중국식 벽돌무덤의 구조를 수용 후 자신들의 전통적인 무덤양식에 적용하여 새롭고 독창적인 무덤형태를 만들었다. 부여 왕릉원에서 확인되는 아치형의 천장에서 육각형, 사각형 천장으로 완성된 무덤구조는 백제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신라와 일본에까지 전해져 고분 건축기술의 교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부여 왕릉원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금동제 장신구 및 허리띠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왕릉원 서쪽에서 절터(능산리사지)가 발굴되어 백제 금동대향로(국보)와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 부여 왕릉원이 사비시대의 백제 왕실의 능묘군이라는 것을 재확인 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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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나성

나성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외곽성으로서, 부소산성에서 시작하여 도시의 북쪽과 동쪽을 보호하고 있다.
나성은 방어의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나성은 수도 전체를 둘러싸는 방어성의 축조사례로는 중국 북위의 수도였던 낙양의 외성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사례이다. 현재 낙양성은 성곽의 대부분이 소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온전하게 보존된 나성의 가치는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나성은 6.3km 길이의 동나성 구간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까지 고고학 조사결과 성벽 축조 시기와 축성기술, 문지 등이 확인되었다.

백제 사비시기 이전에 도성에서는 수도를 둘러싸는 성곽이 존재하지 않고 왕성과 주변의 자연환경을 이용한 방어체계가 전부였다. 백제 사비시기에는 기존의 방어체계에 나성이라는 외곽성이 추가되었다. 이 외에도 나성의 외곽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또 다른 방어선이 구축되었는데 청마산성, 석성산성, 가림성, 증산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성들이 수도의 1차 방어선 역할을 하고 나성이 2차, 마지막으로 부소산성이 최후 방어선 역할을 하였다.

나성은 방어성의 역할뿐만 아니라 성안과 성밖을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도 하였다. 나성을 중심으로 하여 도성 내부에는 무덤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는데, 성안의 구역은 산자의 공간을 두고 성 밖에는 죽은 자의 공간으로 구분한 것이다. 평민, 귀족뿐만 아니라 왕실의 무덤까지도 도성 안에는 만들지 못하도록 제한하였으며, 이것을 ‘경외매장 (京外埋葬)’이라고 한다. 왕실의 능묘군인 부여 왕릉원도 나성의 바깥에 위치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백제 웅진시기에는 나성과 같은 외곽성은 없었지만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이 수도의 외곽에 만들어진 것도 같은 원리라고 볼 수 있다.

나성에 기본적으로 사용된 공법은 판축공법이다. 판축공법이란 흙을 한켜씩 쌓아 올리는 기법으로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백제에 전해졌다.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판축공법을 백제의 자연환경의 맞춰 적용하였고,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백제의 축성기술이 일본에 전해지게 되었다.

Introduction

익산 왕궁리유적

왕궁리유적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기에 조성된 왕궁이다. 발굴조사 결과 장방형의 궁장 내부에서는 왕궁과 관련한 다양한 시설들이 확인되었다.
왕궁리유적은 높은 곳은 깎아 내고, 낮은 곳은 성토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왕궁이 들어설 공간을 마련하였다. 담장이 들어설 지점은 바깥쪽을 경사지게 깎아내서 왕궁 내부가 담장 바깥보다 3~4m 이상 높게 조성되었다. 이와 같은 공간 조성은 중앙부를 높게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높은 대지 위에 만들어진 건물이 궁장 밖에서 보면 더욱 장엄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왕궁리유적은 1976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그 전모가 확인되었다. 왕궁리 유적에는 다양한 시설들이 확인되었는데, 왕궁 대형건물지와 주변 전각 건물의 흔적, 왕궁에 머무는 궁인들을 위한 화장실 시설, 왕궁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만들던 공방, 왕이 휴식을 취하던 정원과 후원, 후원을 빙 둘러가는 물길까지 다양한 시설들이 있다.
특히 정전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는 백제 왕궁 구조 및 공간구획의 원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 건물지는 부여의 관북리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지니고 있다. 또한 왕궁리유적에서 백제 사비시기 왕궁 정원이 발견됨으로써 중국-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정원문화의 교류양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궁리 정원에서 발견된 기암괴석 중에는 태호석, 혹은 어린석이라고 불리는 중국산 수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당시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준다. 공방지 남쪽에서는 대형의 화장실 3기가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발견되었다. 고대의 대형 화장실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이며 이웃한 일본의 화장실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왕궁은 후에 그 기능이 사찰로 바뀌었는데, 사찰로 기능이 바뀌는 시기에 대해선 백제 말기(7세기 중엽)~통일신라 초기(7세기 후엽)라는 이견이 존재한다. 현재 남아있는 오층석탑이 이를 보여준다. 왕궁리유적은 왕궁의 전체적인 규모와 형태,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1,400여 년 전 백제 왕궁의 모습과 백제인들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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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미륵사지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표고 430m의 미륵산 아래의 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어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역을 자랑한다. 백제 사찰로는 이례적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미륵사 창건 설화가 전한다.
무왕 부부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탑과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이 설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우선 미륵사가 백제의 국력을 모은 국가적 가람이었고, 습지를 매립하여 평지를 조성하였으며,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 번의 설법을 통해 모든 사람을 구제한다는 불교경전의 내용에 따라 가람배치를 구현했다는 점이다. 이들 사항은 1974년부터 이어진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조사 결과 사찰의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기인 7세기 초이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후하여 폐사(廢寺)된 것으로 밝혀졌다.

미륵사는 중문-탑-금당이 일직선상에 배열된, 이른바 백제식 <1탑-1금당> 형식의 가람 세 동을 나란히 병렬시켜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백제는 1탑 1금당의 사찰구조를 바탕으로 불교의 미륵신앙을 구현하기 위해 <3탑-3금당>이라는 독특한 사찰구조로 미륵사를 만들었다. 백제인들은 이 미륵사를 통하여 누구나 평등한 삶을 염원했던 미륵하생의 꿈을 이룩하려 하였고, 이로써 모든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려는 간절한 염원이 반영되어 만들어진, 고대 백제인들의 신념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미륵사에는 3기의 탑이 있었다. 중원(中院)에는 목탑이,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에는 각각 석탑이 있었다. 중원의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서원의 석탑 중 동원의 석탑은 이미 무너져 있었고, 서원의 석탑은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동북 측면으로만 6층까지 남아 있었다. 서원의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 안정성이 우려되어 200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석탑의 본격적인 해체조사와 함께 다양한 분야의 학술조사연구와 구조보강, 보존처리 등을 시행하여 2017년 말 6층까지 석탑의 조립을 완료하였다. 이후 미륵사지 석탑 가설덧집 철거 및 주변 정비를 진행하여 2019년 4월, 문화재청장, 도지사, 국회의원, 학계, 종교계, 시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가졌다.
한편 2009년 서원의 석탑에 대한 1층 해체조사를 진행하던 중 심주석 상면 중앙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사리장엄은 사리공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사리호, 금제사리봉영기, 은제관식, 청동합 등 다양한 공양품이 일괄로 출토되었다. 사리봉영기의 판독 결과 석탑은 639년 사리를 안치하면서 건립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미륵사가 백제 무왕시기에 창건되었다는 역사 기록이 정확함을 입증해 준 보기드문 사례이다.